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라는 말은 태아가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다. 태아가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 더구나 만일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인간으로 성자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태아는 인간이 아니지만,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 어떻게 인간 아닌 존재가 생명권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위 인용문에서 언급했듯이 생명권은 인간이 지닌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데, 어떻게 인간 아닌 존재가 인간의 기본권을 가질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헌법불합치 의견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논변과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드워킨이 강조하듯, "태아의 생명권"과 "태아 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구별한 것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의 본질적인 요소다. 헌법불합치의견은 이 근본적인 구별을 은근슬쩍 지워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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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불합치의견은 엄밀한 법적 논증을 한 것이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정치적 판단을 한 것이고, 그 결과 태아의 생명권은 법적 개념이 아니라, 아무 데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정치언어가 되어버렸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낙태죄 폐지를 지지해온 시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임신중단 반대 진영에게 강력한 무기를 쥐여준 꼴이 되어버렸다.


🔖 이런 꼼수의 목적은 태아의 법적 지위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인간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데 있다. 태아의 생명권은 대부분 임신중단에 관한 논쟁에서만 주장되고, 그 주된 기능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태아 생명과 관련한 다른 문제들, 예컨대 태아가 손해배상청구권을 가질 수 있는지의 문제에서 태아의 생명권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임신중단 논쟁에서 태아의 생명권이 등장하는 순간,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믿음, 그리고 여성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가부장주의적 믿음이 뒤섞이게 된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가부장주의적 장치를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고,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규범 자체가 가부장주의에서 태어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태아의 생명권 개념과 가부장주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 임신중단의 사유를 묻는다는 점에서 그냥 그 권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포함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 임신 유지와 중단에 대해 판단하고 개인의 의지를 형성하는 과정은 오롯이 임시한 여성 자신의 내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여성의 동의 없이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없고, 국가도 개인적 결정의 사유를 요구할 수 없다. 만일 국가가 임신중단의 사유를 심사하고, 그 결과에 때라 임신중단을 허용하거나 금지한다면,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부정될 것이다. 혹은 임신중단 사유가 허용과 금지의 기준이 되지는 않더라도, 국가가 사유 제출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부정되는 것이나 다름없다.